우리가 농담을 나누어도 된다는 컨센서스
悄悄的我走了 조용히 나는 가네,
正如我悄悄的來 조용히 내가 왔듯이
我揮一揮衣袖 나는 소매를 한번 흔들고,
不帶走一片雲彩 구름 한 조각 가져가지 않네
- 쉬즈모, 『다시 케임브리지와 이별하며』
많은 지인들에게 나의 마지막 모습과 기억이 장례식장일 텐데 이것이 가끔 나를 불편하게 한다. 강남역이나 테헤란로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마주치고 (1년에 2번 즈음 있는 일이다) 인사해야 하면 어떨까? 상대는 다시 그 기억을 떠올리고 우리는 어색한 인사를 나눌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완전히 정신병적 망상이지만 머릿속에서 이 생각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이곳에 책이나 여러가지 일상 이야기를 풀어 놓고, 내가 고해의 바다를 여러분처럼 잘 견디고 있으니, 우리가 농담을 나누어도 된다는 컨센서스를 주고 싶다. 아마 이 블로그는 책이 메인 주제가 될 테니 책 이야기부터 하고 싶다. 책 그리고 죽음.
우리가 '잘했음'이나 '잘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할머니는 마녀와 비슷하다'라고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아고다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책
글을 쓰기 위해 찾아봤는데, 올해는 오늘(2026년 6월 9일)까지 97권의 책을 봤다. 25년에는 123권. 나는 병렬독서를 하는데 지금은 8권을 진행 중이다 (어쩌다 내 기준으로도 많은 편이다). 일을 관두면 뭘 하겠냐는 질문에 '책을 더 많이 보게 되겠죠'라는 대답을 회피용으로 썼는데 생각보다 진정성 있는 대답이었다.
아내랑 나는 책을 좋아했다. 물론 아내는 나보다 더 많고 다양한 책을 보고 (책 외에도) 더 많은 컨텐츠를 탐닉했다. 아직도 우리가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에 빠져서 신나게 책에 대해 이야기 나눌 때가 가끔 기억난다. 해커 리스베트 살란데르의 캐릭터에 대해, 미카엘 블롬크비스트의 여성 편력에 대해. 나중에 개봉한 영화도 보러 갔지만 실망스러웠다. 작년에 밀레니엄을 혼자 다시 봤을 때 기대보다 통속적인 소설이라는 인상을 받은걸 보면 아마 이때는 (십 수년 전이다) 첫째 육아를 힘들게 하던때라 우리가 소설에 (다시) 빠질 수 있다는 감정이 좋은 인상을 남긴 것 같다.
미야베 미유키도 같이 보고 좋아했다. 『모방범』과 『낙원』을 같이 봤는데 나는 그 후로도 미미여사의 다른 작품들을 계속 찾았고 아내는 더 보지 않았다. 그때는 어리둥절 했지만 이제는 익숙한 아내의 행동이다. 나를 어떤 덕질의 물가에 데려다 놓고, 자기는 발목 정도만 담그고 다른 곳으로 가는 일.
우리는 가즈오 이시구로도 같이 감탄하며 좋아했다. 『나를 보내지마』도 영화도 같이 봤다. 나는 『녹턴』도 좋아했고 『파묻힌 거인』은 아내가 보기 시작해서 따라 보다가 (작품 배경의) 당황스러움에 포기했다. 할머니를 공주라고 부르는 것을 두고 아내랑 즐겁게 농담을 한 기억을 재료삼아 작년에 겨우 다 보았다.
단순한 거예요, 공주. 케리그가 정말로 죽고 이 안개가 사라지게 되면 말이오. 그래서 기억들이 돌아오고 내가 당신을 실망 시켰던 기억들도 생각나면 말이오. 혹은 한때 내가 저질렀던 어두운 소행들이 기억나서, 당신이 날 다시 보게 되고, 지금 당신 이 보고 있는 이 사람이 더 이상 진짜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말이오. 이것만은 약속해줘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내게 느끼는 그 마음을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줘요.
- 가즈오 이시구로,『파묻힌 거인』

나는 코맥 매카시를 좋아했지만 아내는 그러지 않고 작가를 존중했다. 결혼 전,『로드』가 영화로 개봉했을 때도 같이 보러 갔다. 지금도 나는 미국 최고의 작가는 코맥 매카시라고 생각한다. 『핏빛 자오선』, 『모두 다 예쁜 말들』, 『로드』. 다만 『패신저』부터는 너무 어려웠다. 나의 투자자 친구들은 코카콜라를 보고 워런 버핏을 떠올리겠지만, 나는 잔혹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상에 남겨진 자동판매기 속 희망을 생각한다. 아무래도 전자가 더 행복한 것 같다.
할 일의 목록은 없었다. 그 자체로 섭리가 되는 날. 시간. 나중은 없다. 지금이 나중이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 너무 우아하고 아름다워 마음에 꼭 간직하고 있는 것들은 고통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슬픔과 재 속에서의 탄생.
- 코맥 매카시, 『더 로드』
아내는 필립 로스와 존 쿳시를 이어서 좋아했다. 지금도 집에 (내가 아직 전혀 손대지 않은) 두 작가의 작품들이 쌓여있다. 결혼 생활의 어디 즈음 나는 불현듯 르 카레와 스파이 소설들을 탐닉하기 시작했고 아내는 나를 위해 르 카레 책들을 사놓았다. 영화 『모스트 원티드 맨』을 같이 (나는 책으로 먼저) 봤다. 드라마 『나이트 매니저』는 아마존 프라임으로 봤는데 둘 다 무척 좋아했다. 나중에 『나이트 매니저』를 책으로 봤을때 드라마와 결말이 다른 부분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당신에게 미래가 있다는 것만 기억해요, 파인 씨. 절대 포기하지 말아요. 나를 위해서든, 누구를 위해서든. 약속해줘요." 그래서 그는 약속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무엇이든 약속하듯.
- 존 르 카레, 『나이트 매니저』
아내가 옌렌커를 보기 시작해서 『그 해 여름 끝』을 나에게 설명해주던 기억이 난다. 나는 작년에서야 이 책을 보았다. 생각해보면 아내는 중대장의 감정을 나에게 전달하려 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누가 널 좋아하면 너도 설레일거야 같은. 나는 그걸 항상 나의 결혼생활에 대한 충실성으로 반응하고 (우리 관계가 나쁘지 않은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몰랐다. 내가 답답했을 수 있지만, 그런 이야길 하는게 아니라고 굳이 교정해주지 않았다.

캐나다
지금 아내의 책을 생각할 때 가장 강렬하게 떠오르는 책은 리처드 포드의 『캐나다』다. 제목이 캐나다인 관계로 나는 이 책을 봤다는 사람을 아내말곤 본적이 없다. 필립 로스와 존 쿳시 사이의 어디에선가 아내는『캐나다』에 빠져들었다. 내 기억 속 아내가 책을 두 번 이상 보았는데 상당히 드문일이다. 나에게 이 책 이야기를 무척 많이 했다. 한 숨 쉬어야 하는 전화를 끊고 나서, 산책하면서, 나에게 줄거리를 공유하고 자기 생각을 이야기 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 부모들의 계산법, 남은 아이들의 행방, 캐나다라는 지역의 의미. 나는, 음, 이 시기즈음이면 우리의 관계도 여러 고비를 넘고 성숙했으므로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단 한번도 '그래, 이미 여러번 들어서 알고 있어' 라고 한 적은 없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힘든 일이 나에게 있었을 때 아내가 이 책을 나에게 권한적도 있고 나도 1/4정도 페이지를 넘긴적이 있다. 서슬 퍼런 초반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덮었는데 좋은 책이라고 생각했다.
은행 강도들한테도 자식들이 있을 텐데도 세상은 보통 그들에게 아이들이 없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아이들의 이야기 - 나와 누나의 이야기는 우리가 보는 대로 무게를 재고 배분하고 판단해야 하는 우리의 이야기다. 몇 년 뒤 대학에서 나는 위대한 비평가 러스킨이 작문이란 불균등한 사건의 배열이라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다시 말해 무엇과 무엇이 비등한지, 무엇이 더 중요하고 앞으로만 내달리는 인생길에 무엇을 놓을 수 있을지 결정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라는 것이다.
- 리처드 포드 『캐나다』
작년 초 - 사별 후 반년이 지났을 때 - 캐나다를 다시 처음부터 펼쳐서 끝까지 다 보았다. 아내는 책을 깨끗하게 보진 않았는데 카페에서 중간 중간 접힌 페이지를 읽을 때면, 카페 천장을 여러번 보아야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 책이 자기 인생의 책이 될 수 있을까. 이 사회에 있을, 소설 캐나다를 추앙하며, 마음속에 담으며 세상이란 연옥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당신들의 영혼에 부디 작은 평화가 찾아오기를. 인생도 작문처럼 불균등한 사건의 배열일테니.
죽음에 대한 책
사별 후에는 습관처럼 죽음에 대한 책을 보기 시작했다. 원래 '이' 장르는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이 될 때』나 『잠수종과 나비』정도만 봤다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죽음과 상실에 대한 책들을 보기 시작했다. 독서 자체가 애도이면서 동시에 강박이 되었다.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교과서적인 접근이 좋았지만 방대함에 질리는 면이 있었다. 케랑갈의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달리기를 하며 윌라로 들었는데 두 번 정도 발걸음을 멈추고 양재천을 멍하게 바라봤다. 점점 원래(너무 재밌는 표현 아닌가?)라면 안 볼 것 같은 책들도 보게 되었다. 이상문학상을 탄 『그 개와 혁명』은 장례식장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패드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도 중간의 감동이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봤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수필들을 보고 나는 이제 미모사를 보면 『환희의 인간』을 떠올리는 사람이 되었다. 신화는 필연적으로 죽음을 다루므로 조셉 캠벨의 신화 책들도 수십년만에 다시 보았다. 신화에서『바가바드 기타』로 건너가기도 하고. 애도, 상실이 주제가 되는 소설과 에세이를 계속 보았다.
심지어 애도는, 욕망의 대상이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기다린다. 애도란, 자신이 기다리는 대상이 무엇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하면서 기다리는 맹목적인 기다림이다.
- 파스칼 키냐르, 『행복한 시간들』
엘런 타운센드의 『우주의 먼지로부터』는 스트레스가 정말로 뇌를 망칠 수 있다는 과학적 설명들이 위로가 되었다 (나는 요즘도 도로에서 구급차가 지나가면 나에게 어떤 PTSD가 발현되는지 살펴본다. 답은 아니, 그렇지 않다). 그리고 당연히 나의 불행을 작가가 겪은 더 큰 불행과 비교해 보았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별자들이 이런 품위 없는 버릇이 생겼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겪은 죽음의 종류와 고통을 비교해보는 것. 타살과 자살, 병사와 사고사, '받아들임' 에 걸리는 시간의 길이 등.
그만큼 우리가 삶에서 예측 가능성을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기서 벌어지는 일이 지금 여기 나에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숫자와 확률에 집착하고, 과학을 그것이 절대 할 수 없는 - 절대 하지 않을- 예측의 영역으로까지 그릇되게 밀고 나간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근본적 진실을 가릴 뿐이다. 통제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일은 언젠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확률만 붙들고 살다가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상의 마법을 빼앗기고 만다.
- 엘런 타운센드, 『우주의 먼지로부터』
진정한 위안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어. 다시 말하면 어디에서든 찾을 수 있다는 말이야.
- 그레텔 에를리히, 『열린 공간의 위로』

올해 초 『세계 장례 여행』을 볼 때 즈음 슬슬 이런 짓을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장례문화에 대한 책까지 볼 필요가 있을까? 그래도 삽화와 내용은 무척 좋았다. 김범석 교수의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에서 거의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내가 꼭 암에 대한 책을 봐야하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이 책이 이 죽음의 시리즈에서 가장 크게 나를 바꿔 놓았다. 지금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고정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런게 있다면)에 가장 가까운 책이다. 본래무일물.
가치중립적인 세상에 서사를 부여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좋고 싫음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분별심이 있었다. 그 분별심은 나의 눈을 흐리게 했고, 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를 고집했다. 부산물로 자기중심성과 아상이 생겨났다. 타자화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려 하며 남과 나를 분리해서 바라봤다. 당연히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 김범석,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
죽음과 상실에 대한 책을 보고 내가 찾은 건 너무나 뻔한 사실이다. 애초에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 내 머릿속에 어떤 과대망상적 내러티브가 있든, 나에게 일어난 일은 그저 우연이다. 나는 특별하지 않다. 스스로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데서 거의 모든 문제가 일어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생각은 그저 의견에 지나지 않고, 내 의견은 적을수록 좋은데 말이다.
사형수를 가리켜 "그는 사회에 대하여 죗값을 치르게 된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이제 그의 목이 잘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보기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자기의 운명을 똑바로 마주 바라보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 알베르 카뮈, 『안과 겉, 결혼, 여름』의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이 글은 내가 어떤 깨달음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아니다. 아직 책을 읽고 있고, 달리기를 하고, 누군가를 만나면 어색하더라도 농담하며 인사할 수 있다는 기록이다. 나에게 일어난 일을 너무 특별한 이야기로 만들지 않은 채 관조해 보려는 기록이다.